햄보칼수가 업서!



고딩 때 동창들 두엇과 만나면 보통 호프집에서 닭튀김 하나 시키고 시답잖은 소리들이나 하며 시간을 죽이곤 한다. 꼴에 운전들 한다고 술은 또 안 마심. 그리고는 밀키스 같은 거 시켜서 홀짝이니 살이 찌지.

무슨 서울대 동문 의과대 동문도 아니고, 그냥 고만고만한 사회 중하위권 범부들끼리 모여서 연애 얘기를 하든 사지도 못할 차 얘기를 하든 그러면서 새벽까지 노가리를 까는 것 뿐이다. 어디에 주식 투자를 했느니, 어느 동네 땅을 몇 평을 샀느니 하는 멋드러진 주제가 나올 만한 신분은 아니다.

전에 만난 두 놈 중 가장 잘 나가는, 성공한 녀석(A)으로 치자면 유일하게 유부남이고 딸도 있다. 연애경력 다수. 고등학교 교사이며 아직도 삐까뻔쩍 광나는 16년형 어코드 하이브리드 타고 다닌다. 30평대 자가 주택(아파트) 보유중.

만만찮게 잘 나가는 녀석(B)은 부모님 명의의 작은 건물에서 잡화점을 한다. 장사 잘 돼서 올 여름은 선풍기 파느라 쌔가 빠질 지경. 연애경력 중상급. 결혼을 매우 하고 싶어하는데 최근 여친이랑 헤어져서 고민이 많으시다.

나로 말하자면 연애경력 최하급. 프리랜서 개발자.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현재 비중 있게 적을 둔 곳은 없는 그냥 비정규 계약직. 월급이 나쁘진 않지만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일 못 구하면 놀아야 하니 곧죽어도 안정적이라고는 못 한다.

B와 나는 나이 먹을 만큼 먹고 부모님 품을 못 떠나는 캥거루족이고, 그나마 B는 가족 경영 가게니까 그렇다손 쳐도 나는 뭐람. 뭐긴 뭐야 그냥 흔히 보이는 부모님 모시고 사는 노총각이지.

딱 봐서는 내가 제일 별볼일 없는 인간인데, 서로 썰을 풀다보면 의외로 삶의 만족도는 내가 가장 높은 것 같았다. 현재 일하는 곳에서는 야근도 특근도 해 본 적 없이 대체로 스무스하게 일이 진행되고 있었고, 집에 와서는 내 방에 처박혀 유로트럭을 하든 건담을 조립하든 하면서 싱글 라이프를 만끽하고 있다.
총각 때부터 여자가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었던 것처럼 굴던 A는 이번 여름 휴가때는 혼자서 차 타고 기름 펑펑 쓰면서 전국 일주 하고 올 예정이라는 나의 말에 말도 못할 부러움을 표시했다. 육아 관련으로 부부 관계에 위기를 겪었던지라 어느 정도 회복된 지금도 대미지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B는 자기 시간이 없는, 원치 않는 워킹홀릭 자영업자이다. 1년 365일 일하며 월 2일 쉬는 것도 힘들다. 가게 닫고 여친이라도 만난 다음 집에 오면 새벽이고, 다른 직장인들과 다름 없는 시간에 일어나 하루 종일 일을 한다. 최저임금때문에 투덜댔다간 문빠 새끼들한테 욕밖에 못 먹는 자영업자이시다. 게다가 최근 여친이랑 깨진 것도 너무 쉴 새 없이 일을 해댄 탓도 없지 않아서...

그래서 나의 '행복'의 근원은 무얼까 다시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도망칠 구석이 많다. 달리 말하자면, 포기하면 편하다는 거다.
30대인 주제에 노회찬 닮았다는 소리도 들어볼 만큼 빻은 얼굴에, 모아놓은 돈도 없어서(그나마도 비트코인에 꽤 많이 꼴아박았다 ㅋㅋ) 어디 서울에 아파트 전세 얻을 능력조차 없으니, 그냥 남부럽지 않은 괜찮은 결혼은 이미 글렀다 치고 살면 된다. 그나마 운이 좋은 건지, 그런 삶을 선언해도 이제 크게 흠잡히지 않는 사회가 돼 있다. 집값이 이렇게 요동을 쳐대는 와중에는 꼼짝 말고 부모님 명의의 집에 얹혀 살면서 돈 생기는 대로 생활비나 드리면 된다. 차 정도는 BMW로 바꿨으면 좋겠다.

어디에든 있는 필부들 답게, 우리들이 딱 그냥 링크에 걸려 있는 뉴스에서 대답하는 대부분의 인생과 비슷하다. 1.가족 부양에 어느 정도 부담을 느끼고 2.조금이라도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으며 3.그러면서도 더 많은 여가와 4.더 넓고 좋은 인간 관계를 꿈꾼다.
나는 1번과 4번을 포기했고 2번이 불안하고 3번은(당장이나마) 괜찮은 편이다. A는 1번에 좀 불만이 있으며 2번(어차피 공무원이라)을 포기했고 3, 4번에서 자유롭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나와 A는 행복하다고 단언한다(A가 불행하다 그러면 진짜 욕 먹겠지). 욕심 부려 마땅한 것들 중 많은 것을 포기하거나 이룩했고, 불행한 상황에 처해있지도 않으니까. 애초에 우리 셋 다 에어콘 잘 나오는 데서 일한다. 그런 와중에 매양 투덜대기만 했다간 돌 맞는다고?

그와 달리 워라밸과 여자 문제로 심하게 고민하는 B는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순위를 낮추는 데 일조하고 계신 듯하지만, 그 앞에서 뻔뻔하게 '나는 행복합니다' 선언을 해놓고도 나와 A가 서로 으이구 븅신들아 하면서 자조할 수밖에 없었던 건, 저런 것들을 포기하고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이상한건지 아니면 저런 것들을 포기해야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이상한건지 알쏭달쏭했기 때문.

어디 절간 사는 중들이 들으면 해탈하셨소이다 인샬라 라고 농지거리라도 할지 모르겠지만 역시 포기는 해탈이 아니지. 포기했다는 건 욕심을 부렸다는 거고, 그리고 결국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 아니겠어. 치료하고 극복하는 게 아니라 그냥 가끔 따끔거리는 걸 참아내고 곪지나 않길 바라며 억지 웃는 얼굴로 품고 가는 상처다. 애시당초, 돈이 진짜 평생 일 안 해도 될 만큼 썩어빠지게 많으면 대부분 할 필요가 없는 고민들 투성이잖어. 다들 그러고 싶어서 로또를 사고 건물주가 되겠다 아득바득하다 그냥 포기하는 거고. 무슨 놈의 해탈이야 그게.

내가 뭐 이것저것 포기하자 포기하지 말자 그런 훈수를 두자는 건 아니고, 그냥 남이든 자신이든 무언가를 포기하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뜩이나 포기한 게 생기면 좆같은데 그거 가지고 뻰찌 먹으면 얼마나 빡쳐. 그러면 또 행복 지수가 내려가지. 그러니까 나더러 왜 여자 안 만나느냐고 잔소리 좀 하지 마! 못 만나서 포기한 거야!


덧글

  • 알토리아 2018/07/27 23:39 # 답글

    30대 공무원이 어코드 하이브리드라니 굉장한 분이시군요....
  • 뇌빠는사람 2018/07/31 11:48 #

    뭐 부모님도 교사여서 금수저 은수저는 아니지만 평생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던 친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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